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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 교직 생활 마치고 정년퇴임기념전 연 한운성 명예교수
<욕심 많은 거인>, <매듭>, <과일 채집> 등으로 익숙한 한운성 명예교수가 2011년 정년퇴임을 맞아 그간의 작품을 총망라한 기념전을 열었다. 30여 년간 철저히 작업하는 작가이자 교육자로 지낸 그의 예술과 삶에 대해 들어보는 기회를 마련했다.

한운성 교수가 작품 제작에 사용하던 판화 프레스를 기증했다. 새로운 판화 기법을 한국에 소개한 것만큼이나 한운성 교수를 상징하는 물건이기도 하다. 현재 서양화과 52동 402호에 설치되어 있다.

판화 프레스 모델명 3048TTE- 90007 dat. 1990.1. TAKACH GARFIELD PRESS CO.INC. 한운성 교수가 작품 제작에 사용하던 판화 프레스를 기증했다. 새로운 판화 기법을 한국에 소개한 것만큼이나 한운성 교수를 상징하는 물건이기도 하다. 현재 서양화과 52동 402호에 설치되어 있다.

30여 년간 서울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떠나는 마음이 어떤지?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군자의세가지즐거움중하나가영재를얻어 교육하는 즐거움인데 이것만큼은 제대로 누렸다고말할수있다.유학후모교에서시간 강사로처음불렀을때많이기뻤고후배들을 가르칠 때 항상 보람을 느꼈다. 지금은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다.

작업실을 철저히 지키는 것과 다작으로 유명하다. 그렇게 많은 작업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나도 중간에 포기하고 천갈이 한 작업도 많다. 우리 학생들의 유일한 단점이 작업량이 적다는 것인데 작업의 10%만 살아남는다고 생각하면 많이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천재성이 아니라 작업량이 작품의 질을 결정한다. 다작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지, 천재라고 해서 가만히 있다가 그리기만 하면 걸작이 나오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지금까지 1200점 가량 그렸는데 앞으로 700~800점은 더 그릴 것 같다. 나는 주말 없이 월화수목금금금 작업한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할 때 90번을 실패하면서도 금방 불이 들어올 것만 같은 마음에 실험을 계속했을 것이다. 나도 매일 ‘오늘은 걸작이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래서 동이 트기 무섭게 작업실로 달려가고 싶어진다.

유학 전 1970년대 한국 미술의 상황은 어땠나?

추상표현주의가 대세였다. 잭슨 폴록의 영향이 강해 모두들 물감을 뿌려 작업했다. 학교 실기실은 좁은데 학생들이 전부 바닥에 캔버스를 놓고 물감을 뿌려 걸어다니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학교를 다닐 당시에는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조형적인 측면과 구상성을 추구하는 그림은 그릴 엄두가 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동안 다루었던 콜라 캔이나 신호등, 매듭 등이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소재로 해석되곤 한다. 특히 더 애정이 가는 소재나 작업이 있는지?

1974년 미국에 있을 당시 라디오에서 코카콜라의 중국 수입이 결정됐다는 뉴스를 듣고 코카콜라 캔 작업을 하게 됐다.
냉전 시대에 코카콜라가 자본주의 시장을 다 차지하고 이제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시장까지 넘본다는 의미에서 <욕심 많은 거인> 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이 작품이 사실상 데뷔작이되었고이작업이후<눈먼신호등> 과같이사회의시대적상황을표현하는것이 작업의 지향점이 됐다. 지금도 이 작품을 가장 아낀다.

유행에 휩쓸리지 않으면서도 소통하려는 노력, 두 가지 사이에서 흔들리기 쉬운데 작업의 중심점이나 확신 같은 것이 있다면?

오헨리가 마지막 잎새를보고걸작을남긴 것은 그만의 감수성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잎새를본사람은지구상에수천만이 넘지 않겠나. 나는 체질적으로 사회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항상 내가 어떤시대를 살고 있는지를 생각한다.이런감수성과시대에대한 고민이매번작품에반영됐다.20세기에서21 세기로 바뀌는 시점에서 유전학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생각에 시작한 것이 과일 채집이다. 과일은 예쁘고 달도록 유전자 조작이 되고 있다. 과학자가 식물이나 곤충 채집을 하듯이 나는 화가니까 과일의 원래 모습을 그림으로 보존하려 한 것이다. 이제는 디지털 시대라고 생각한다. 다음 작업으로는 디지털 이미지를 다루려고 한다.

한운성과 <과일 채집> 1999년부터 최근까지 이어진 <과일 채집> 연작 중 하나이다. 자본주의가 공산주의 중국에까지 파고든 시대 상황을 상징한 <욕심 많은 거인>의 코카콜라와 마찬가지로, <과일 채집>은 유전자 조작이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시대에 과일의 원형을 기록하려는 시도이다. 사실적이면서도 회화적인 생명력을 가진 한운성 명예교수의 대표작이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판화를 전공으로 유학을 다녀왔다. 그 당시에 비해 지금의 한국 판화는 달라진 점이 많을 것 같다.

유학당시2년이라는기간동안판화를하면 배울것이많을것같아판화전공을선택했다. 1975년귀국후첫개인전을열었을때우리나라 판화는 작은 흑백 작품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내가큰컬러작품을판화로하니까사람들이 한운성이미국가서포스터를배워왔다고할 정도였다.국내에판화재료가없어작업을못 하던중에쓴『판화세계』가지금은교과서처럼 됐다. 이제 우리나라 판화의 저변도 넓어지고 다양해졌다.내가쓰던판화프레스두개를 이번에 학교에 기증했다. 그런데 판화가 3D업종 이라 할 만큼 어렵고 힘들어서 학생들이 기피하는 것 같아 아쉽다. 판화가 다시 살아나는 시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학생이나 학교, 동문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학생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작품의 질은 역시 양이 결정하니 작업량을 많이 늘렸으면 한다. 깊이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끔은 우직하게 작업에 몰두할 필요도 있다.

퇴임 후 작품 활동 외에 어떤 계획이 있는지?

젊을때는비행기조종,말타기,피아노 연주를 하고 싶었는데 이것들은 꿈이고, 이제홀가분하게작업만할수있어서오히려 더좋을것같다.다시신인이된마음으로 새작업을할것이다.오늘도다시,걸작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말이다.

인터뷰: 서한겸(서양화 석10)

한운성 (회화 65)

194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미대와 동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하고 국내 미술 분야에서 최초로 풀브라이트Fullbright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 템플대학의 타일러미술대학에서 판화를 전공했다. 2012년 2월 까지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대영박물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으며 주요 저서로는 『판화 세계』, 『나의 현대미술 산책, 환쟁이 송』 등이 있다.

written by 관리자
2012/ 03/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