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설립
1)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전문 고등교육기관으로 탄생
미술대학은 1946년 10월 15일 국립서울대학교가 9개 단과대학과 1개 대학원으로 개교할 때 예술대학의 미술부로 설립됐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전문 고등교육기관이 탄생했다. 미술부는 1953년 4월에 공표된 “국립학교설치령”에 따라 서울대학교의 구조가 개편되면서, 4월 20일 미술대학으로 승격됐다. 1949년 12월 31일에 공표된 교육법에 의해 서울대학교가 국립서울대학교의 공식 명칭이 되었다. 서울대학교는 2011년에 국립대학법인이 되었다. 국립서울대학교는 미 군정청이 1946년 8월 22일에 공표한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 관한 법령”(1946. 8. 22, 군정법령 제102호)에 따라 설립되었다. 미군정은 해방 후부터 조선총독부의 행정기구를 접수하여, 한반도의 38도선 남쪽 지역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통치하던 미국육군군사정부(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다. 미군정은 군정청 안에 학무국을 설치하고 1945년 9월 11일부터 교육업무를 시작했다. 학무국은 1946년 3월 문교부로 승격됐다.
군정청은 문교부를 통해 위의 법령 공표 두 달 전인 6월 19일에 “서울종합대학안”을 발표했다. 그 다음 달인 7월 13일에는 문교부장 유억겸과 미국인 문교부장 피틴저(Andrey O. Pittinger) 중령이 “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이하, 국대안)을 언론에 발표했다. 국대안의 요지는 군정청이 1924년 일본이 서울에 설립했던 경성제국대학을 인수해 10월 7일에는 미국인 총장을 임명하고, 10월 17일에는 경성대학으로, 그 다음 해에는 서울대학으로 이름을 변경해 운영하다가 그것의 3개 학부와, 역시 일제강점기에 개교한 9개의 국·공립 및 사립전문학교들을 개편하거나 통합 개편하여 국립종합대학교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미 군정청은 제 2차 세계 대전 후 이념적으로 대치하게 된 소련과 한반도를 38도선을 경계로 나눠 주둔한 정부로서, 남한에 국립대학 설립을 주도할 때 실질적으로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군정청은 기존의 건물, 설비 및 전문 인력을 활용할 수 있어 국가재정을 가장 유효하게 쓸 수 있다는 효율성과 경제성을 위와 같은 방식으로 국립종합대학교를 설립하려 한 배경으로 들었다. 이에 따라 개교 시 9개 단과대학인 문리과대학·사범대학·법과대학·상과대학·공과대학·의과대학·치과대학·농과대학·미술부가 음악부와 함께 속했던 예술대학이 설립됐는데, 미술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전신이 있었다. 예를 들어 의과대학은 1885년에 세워진 광해원에서, 법과대학은 1895년에 설립된 법관양성소에서, 농림과학대학은 1906년에 농상공학교 농과에서 분리된 농림학교에서 대학의 뿌리를 찾을 수 있고, 그 외의 분야의 교육기관은 일제강점기에 다른 형식의 전문학교로 존재했었다. 음악부는 초대 부장이 된 현제명이 1943년 4월에 문을 열었던 경성음악연구원을 흡수했다. 경성음악연구원 이전에도 1938년 김재훈에 의해 설립됐다가 1942년에 폐교된 경성음악전문학원이 있었다. 미 군정청이 1945년 12월 25일에 설립을 인가한 경성음악학교는 음악부의 전신이다.
우리나라에 미술전문 고등교육기관 설립이 지체된 것은, 대한제국 수립 전부터 시도했던 국민 주도의 국립대학 설립이 실현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간섭과 식민지화 때문이다. 일찍이 1888년 대학창설을 제안했던 박영효는 1894년부터 비밀리에 ‘국립대학’ 설립 계획을 진행했다. 그러나 고종이 왕립대학 설립으로 승인했던 이 계획은 일본의 방해로 실현되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서양식 미술학교 설립에 대한 논의가 처음 시작된 것은 1880년대 말이다. 1886년에 조인된 한불수교조약 이후 한국과 프랑스 사이에 본격적인 미술교류가 시작되면서,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린 1889년에 이 두 나라가 협력해 공예미술학교를 설립하려는 계획이 입안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러일전쟁 발발로 무산되었다. 그 후 일본이 우리나라의 모든 분야에서 독점권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프랑스와의 미술교류도 단절되었다. 이에 따라 근대적인 미술교육을 전문적으로 받으려던 우리나라 국민은 미국이나 독일로 유학을 간 서너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이를 통해서 일제강점기의 중·고등학교의 미술교육과 해방 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비롯한 국내 대학교의 미술교육은 일본에서 공부한 유학생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것은 오랜 시기 동안 우리나라 미술교육과 미술 분야에서 극복되어야 할 유산이 되었다.
한편 국립서울대학교가 개교하기 직전에 나온 한 신문기사(「국립미술 음악학교」, 『자유신문』, 1946. 5. 27)는 ‘건물만 해결되면 미술대학과 음악대학을 단과대학으로 설립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지 못해, 향후에 독립시킬 계획 하에 잠정적으로 미술과와 음악과로 출범하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술부는 법과대학과 함께 경성대학 법문학부가 있었던 동숭동의 건물을 사용하던 문리과대학의 3층과 부속 박물관 동북 편에 있던 목조건물에서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후 미술부는 피난 시 부산에 임시교사를 마련한 것 외에도 세 차례의 ‘이사’(1949년 4월 구 경성공업전문학교 건물, 1963년 4월 연건동의 수의과대학의 옛 경성의학전문학교 건물과 1972년 하계동 공과대학 내 교양과정부 건물)를 거쳐 1976년 2월에 서울대학교 종합화계획에 따라 1975년에 조성된 관악캠퍼스로 옮겨와 처음으로 독자적인 교사를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미술대학이 다른 단과대학보다 훨씬 더 열악한 환경에서 시작했지만 음악대학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독립적으로 설립된 유럽 국가에서와 달리 9개라는 적은 수의 단과대학 속에 포함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군정이 서울대학교를 미국 대학교 체제를 모델로 설립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미술부는 1953년 4월에 공표된 ‘국립학교설치령’에 따라 미술대학으로 승격됐고, 음악부도 음악대학으로 승격됐다. 이때 농과대학의 수의학부도 수의과대학으로 승격되면서, 서울대학교는 단과대학 12개와 대학원 1개로 구성된 종합대학교로 확장됐다. 현재 서울대학교의 교육기구는 단과대학 15개, 학부 1개, 전문대학원 11개와 5개 계열(석사: 70학과/부; 박사: 72개 학과/부)과 협동과정(석사: 28개, 박사: 29개)이 속해 있는 일반대학원으로 이뤄져 있다.
2) 미술부 설립과정과 교수진 구성 <표 1>
1946년 국대안에 따라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이 구체화 되고 있을 때, 장발과 이순석은 이 계획의 실행부처에 재직 중이었다. 장발은 1945년 12월부터 미 군정청의 교육담당 부서인 학무국의 학무과장이었고, 이순석은 학무국이 문교부로 바뀐 1946년부터 문교부 교화국 예술과의 고문이었다. 이에 따라 당시 문교부 차장으로 국립서울대학교 창설을 주도하던 오천석은 자연스럽게 이 둘에게 미술부 창립을 위한 인물 물색을 요청하게 되었다.
오천석은 코넬대학교(Cornell University)와 노스웨스턴대학교(Northwestern University)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 컬럼비아대학교(Columbia University)에서 철학박사를 취득한 교육학자였다. 이순석은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귀국했으나, 장발은 1919년에 입학한 동경미술학교를 3년 만에 중퇴하고 1922년 9월 미국으로 가 그곳에서 대학을 더 다녔다. 그는 반년 조금 넘게 뉴욕의 국립디자인아카데미에 다니다가 1923년에 컬럼비아대학교 사범대학(Teachers College) 내 실용미술학교(School of Practical Arts)에 입학해 1년 10개월간 수학했다. 이 모든 과정이 졸업으로 이어지지는않았다. 그러나 초창기부터 1948년 6월 말까지 경성대학 법문학부와 국립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서 교수·부교수·조교수·시간강사로 근무한 152명 중 미국 유학자가 4명이었던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당시에는 미국 유학자가 귀했다. 이러한 시기에 그의 미국, 특히 컬럼비아대학교의 사범대학수학 이력은 1945년 10월 경성대학의 총장으로 임명했던 해리 엔스테드(Harry B. Ansted; 1946. 8. 22-1947. 10. 25) 해군대위를 다시 국립서울대학교의 초대 총장으로 임명한 미 군정청에게는 장발이 “미국형 종합대학교” 형태로 한국에 국립대학을 설립하려 했던 미국 정부의 취지를 가장 잘 이해하고 실천할 인물로 비쳐지게 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해방 후 정계에 들어와 1950년 말부터 1961년 5.16쿠데타 전까지 부통령을 한 차례, 국무총리를 두 차례 역임한 장면의 동생이기도 해 기독교신자·중산지주·고등교육이수자와 같은 미 행정부, 주한미군사령부와 미 군정청이 관직에 한국인을 선발할 때 애호하던 조건들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장발이 이순석과 함께 미술부 창립 교원들을 구성했다. 대학본부에 비치된 직원명부에 따르면 1946년 예술대학 미술부 재직교원은 9명으로 “교수: 장발·김용준·길진섭·이재훈, 부교수: 윤승욱·이순석, 조교수: 김환기·장우성·이병현”이다. 이 해 9월 22일자로 임용된 철학교수 이재훈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 달 뒤인 10월 22일자로 임용되었다. 이것은 미술부가 다른 대학보다 늦게 강의를 시작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설립준비가 늦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장발은 미술부 부장으로 임명됐다. 실기의 경우 제 1 회화과(동양화)는 김용준과 장우성이, 제 2 회화과(서양화)는 장발, 길진섭과 김환기가, 조소과는 윤승욱이, 그리고 도안과는 이순석과 이병현이 담당하게 되었다. 이재훈은 미학 담당교수였다. 1940년대 말 을유문화사에서 대학총서 시리즈를 발간했는데 이재훈은 1948년 12월에 출간된 『서양철학사』를, 김용준은 1949년 6월에 출간된 『조선미술대요』를 집필했다. 지금까지 미술대학(이하, 본교) 첫 교수진에 속한 것으로 알려졌던 박의현은 1946년 3월 15일 경성대학 예과 교수로 출발해 같은 해 10월 22일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의 교수가 되었다가, 1948년 4월 1일자로 미술부로 왔다.
미술부 설립시기의 교수들 가운데 유학 경험이 없는 장우성을 제외한 모든 교수들이 일본에서 공부했다. 실기교수들 가운데 일본미술학교 도안과를 졸업한 이병현과 일본대학 미술학부를 졸업한 김환기 외에 나머지 실기교수 5명은 동경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장발은 1922년에 중퇴했고, 이순석과 김용준은 1931년에, 길진섭은 1932년에, 그리고 윤승욱은 1939년에 졸업했다. 즉 네 과에 모두 동경미술학교 출신이 임용된 것이다.
한편 초기 교수들은 같은 시기에 유학하지 않았거나 동경미술학교 출신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대부분이 사제지간이나 고보동창 등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어, 미술부에 임용되기 전부터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윤승욱은 휘문고등보통학교(이하, 휘문고보)에서 장발에게 미술을 배웠다. 이재훈은 일본 조치(上智)대학을 졸업했지만 장발과 같은 시기에 휘문고보의 교사였다. 김용준과 길진섭은 유학 중이던 1930년 백만양화회를 함께 결성했었고, 귀국 후에는 이종우가 개설한 중앙고보의 도화교실에서 고등학생들을 가르쳤다. 김용준과 길진섭은 1934년에 김환기와 송병돈과 함께 목일회를 창립했는데, 후자는 1949년에 미술부에 임용됐다. 목일회는 1937년에 목시회로 이름을 바꿨는데, 이때 장발이 새로 들어오고, 송병돈은 탈퇴했다. 후자는 전시에는 참여했다. 김용준과 김환기는 전자가 1934년부터 살던 성북동 집(노시산방)을 1944년에 이사로 떠나면서 후자에게 넘겨 줄 정도로(수향산방) 서로 특별히 가까웠다. 한편 해방 후 김용준·김환기·길진섭·이순석·장우성은 1945년 8월 18일부터 11월 20일까지 짧은 기간 동안 존속했던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임원으로 함께 활동했다. 1949년에 제 1 회화과 교수로 임용된 노수현은 이 단체의 동양화부 위원장이었다.
모든 학과에 동경미술학교 출신자들이 있었던 초창기 미술부의 체제는 이 일본 학교의 영향을 보여준다. 이 학교의 잔재는 미술부가 설립 시 회화과, 조각과와 미술공예과로 시작한 동경미술학교처럼 미술을 순수미술과 응용미술로 나눠 3개 학과인 회화과, 조소과와 도안과로 계획했던 점, 일본에서 1893년 조각과 소조를 합해 만든 용어인 조소라는 명칭을 사용한 점, 동경미술학교의 미술공예과가 1933년부터 도안과로 불린 점 등에서 발견된다. 도안이라는 단어는 1877년 일본에서 디자인(design)을 번역한 것인데, 이순석은 1931년 자신의 첫 개인전 제목을 《공예도안개인전》으로 칭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전통회화를 그리면서 조선미술사에 대한 글을 발표하던 김용준, 국내에서 전통회화를 수학한 장우성, 서양화와 미술교육을 공부한 장발, 형상적인 회화를 제작하던 길진섭, 여러 방식으로 반 자연주의 회화를 시도하던 김환기, 조각가 윤승욱, 공예가 이순석, 도안가 이병현과 철학 전공자 이재훈으로 이뤄진 첫 교수진에는 인문학으로서의 대학 미술교육을 위해 필요한 다양성과 전문성이 모두 반영되어 있었다.
3) 개교 시 상황
미술부는 설립 시에는 회화과·조소과·도안과의 3개학과체제였으나, 개강 시에는 회화과를 둘로 분리해 제 1 회화과(동양화)·제 2 회화과(서양화)·조소과·도안과로 된 4개학과구조가 되었다. 이 두 회화과는 1951년에 회화과로 합쳐졌다가, 1983년에 동양화과와 서양화과로 분리됐다. 미술부는 학생들을 다른 단과대학보다 늦게 선발했기 때문에 9월 18일에 개교식을 가졌다. 첫 해에 국어·외국어·수학·실기·구술(면접)·체격검사 등을 거쳐 학생이 선발됐다. 교무처 자료에 따르면 이 해에 61명이 입학해 26명이 졸업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미술부 설립 시 9명의 교수 중 9월에 임용된 이재훈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식적으로는 10월 22일자로 임용되었으니 교수들이 학생 입학시험을 임용 전에 주관한 것이 된다.
1946년 개교 시 미술부는 별도로 건물이 마련되지 않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가 있던 건물의 제 1 강의실과 제 2 강의실을 교사로, 그리고 여전히 책들이 가득 차 있던 경성제국대학의 미학과 도서관의 서가 사이에 책상을 놓고 교수실로 사용했다. 서울대학교가 국대안에 따라 추가 건물이나 설비를 준비하지 않은 채 단기간 안에 설립되었기 때문에, 1948년 4월에 있었던 문리과대학과 법과대학 사이의 마찰이 보여주듯이, 부족한 교사 문제는 대학교 전체에 해당되는 사안이었지만 전신이 없었던 미술부의 경우는 더 심각했다. 개교 후 1년 반이 지난 1949년 1월 4일 최규동 박사가 서울대학교 4대 총장에 취임한 후 교사를 재배정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미술부는 법과대학이 쓰고 있던 건물로 이사를 가게 되어 있었으나 미술부의 이사가 늦어져, 법대 학생들이 건물을 차지하게 되면서 학생들 사이에 충돌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미술부는 1949년 4월 옛 경성공업전문학교의 건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한편 학교 근처인 혜화동 195번지에 미술대학 관사가 있었다는 기록은 학교가 교수의 주거를 배려했음을 짐작케 한다.
한편 1946년 말 장발 미술부장은 도안과 학생 이기훈(李基勳)에게 약간 설명을 한 후 서울대학교의 휘장 디자인을 부탁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기훈은 고대 로마 국장의 테두리 장식에서는 월계수 이파리를, 외국 문장에서는 방패를 가져와 후자 안에는 국립, 서울, 대학교의 세 단어의 초성 ㄱ, ㅅ, ㄷ을 차례대로 이어 넣었다. 그는 그 외에 펜, 횃불과 책은 상징적으로, 책 속의 라틴어 문장(VERITAS LUX MEA; 진리는 나의 빛)은 문자 그대로 서울대학교를 학문의 전당이라는 것을 알리도록 첨부하여 학교의 배지를 만들었다.
2. 설립 후부터 6.25전쟁 발발 전까지: 국대안반대운동과 미술대학
1) 국대안반대운동
국대안반대운동은 미군정의 교육정책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이미 군정청이 국대안보다 약 1개월 전인 6월 19일에 발표한 서울종합대학안, 즉 서울에 종합대학교를 설립한다는 계획을 거부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국립서울대학교가 개강을 하기 전부터 이 대학교로 편입될 기존 교육기관의 교수들과 학생들만이 아니라 교육과 문화와 관련된 인사들과 단체들도 반대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군정청이 9월에 서울대학교의 개강을 단행하자 교직원은 단체 사직으로, 그리고 학생들은 동맹휴학이나 등교거부로 맞섰다. 동맹휴학은 1947년 2월에는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초등학생들까지 참여하게 되었다. 국대안반대운동은 그 해 말까지 계속됐다.
서울대학교의 모든 단과대학 학생들이 국대안반대운동에 참여하게 되자 군정청은 문리대, 법대와 상대에 3개월간 휴교 명령을 내리고, 참여 학생들에게는 정학 처분을 내렸다. 이러한 강경책으로 동맹휴학에 참여하는 단과대학은 더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47년 5월 서울대학교 안에서만 전교생 8,040명 가운데 동맹휴학을 주동한 4,956명의 학생이 제적되었다가, 그 해 8월 광복절에 제적학생 중 3,518명이 복적되었다. 국대안파동의 본질이 38선 북쪽을 점령한 소련군과 대치 상태에 있던 미 군정청이 점령지인 한국에 그들의 주도로 우리나라의 국립대학을 설립하는 것을 우리나라 국민이 반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좌익 계열의 교수와 학생만이 아니라 민족주의적인 교수들도 참여했다. 그러나 대학당국이 이 운동을 이념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복적된 학생들이 모두 복교하지는 않았다. 이에 따라 제적되었거나 복적되었더라도 복교하지 않아 학교를 떠난 학생이 1,000명이 넘었다. 380여 명의 교수들은 면직되거나, 사직했다.
2) 국대안반대운동과 미술대학 교수
미술부에서도 교수들과 학생들이 국대안을 반대했다. 교무처 자료에 따르면 1946년 입학생 61명 중에서는 26명이 졸업을 했고, 그들 중 11명이 6.25전쟁 발발 전인 1950년 5월 12일에 졸업했다. 1947년 입학생 14명 중에는 회화과와 조소과에서 각각 한 명씩 두 명만 졸업을 했다. 국대안 반대 데모가 한창일 때 미술부 재학생 수는 최대 75명 정도였다. 이들 중 데모를 주도한 김진항을 비롯한 20여 명의 학생이 제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등록을 하지 않은 학생 수가 많아 미술부는 1947년에 편입학생을 선발하게 되었다. 1948년 입학생 수 45명과 비교해 볼 때 1947년 입학생 수가 14명인 것은 등록을 하지 않은 신입생이 많아서일 뿐만 아니라 편입생이 1946학번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948년 입학생 45명 중에서도 11명만 졸업을 했다.
국대안파동 속에서 장발 미술부장과 갈등을 빚었던 교수들도 학교를 떠났다. 맨 먼저 제 2 회화과에서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하나인 길선주(吉善宙) 목사의 아들인 길진섭이 1947년 4월 15일 사직해 의원면직되었다. 대학본부에 있는 직원명부에는 도안과의 이병현도 길진섭과 같은 날에 의원면직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길진섭은 1948년 8월에 월북했다. 그 다음으로 제 1 회화과에서 일본화풍 청산이 해방 후 세대에게 주어진 시급한 과제임을 강조하던 김용준이 1948년 5월 31일 사직을 하고 동국대학으로 갔다.
이렇게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한편으로는 국대안반대운동의 여파로 일부 교수들이 사직을 해 빈자리가 생겨서, 다른 한편으로는 교수 TO가 생겨 미술부에 실기교수 9명이 새로 들어왔다. 1947년에 신홍휴가 길진섭이 사직한 제 2 회화과에 임용되었다. 1948년에는 조소과에 김종영이, 그리고 이병현이 사직한 도안과에 유영국이 들어왔다. 이것이 유영국이 ‘김환기가 도안과에 자리가 있다면서 지원해보라’고 했다고 이야기한 “자리”로 사료된다. 이 해에 공형식도 임용됐다. 그에 관한 기록은 매우 드문데, 6.25전쟁 시 송도에서 김종영과 송병돈과 함께 자취를 했다는 장우성의 회고가 남아있다. 그 다음 해인 1949년 노수현과 송병돈이 임용됐다. 박갑성은 1949년 9월 1일에 강사로 촉탁을 받았다가 그 다음 해 5월 31일, 6.25전쟁 발발 직전에 전임으로 임용됐다. 한편 본부 교무과에 있는 『교직원대장』에는 박갑성과 같은 날 박영복이 임용되었다가 1952년 11월 10일에 의원면직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에 대한 그 이상의 자료는 찾기가 어렵다. 동양화가 노수현은 서화미술회 출신이었다. 김종영과 송병돈은 동경미술학교를, 그리고 유영국은 동경문화학원을, 그리고 이론교수로 1961년에 본교의 2대 학장이 된 박갑성은 동경대학교 출신이었다. 이처럼 2차로 ‘대규모’로 임용된 신임교수들도 대다수가 설립 시 교수들처럼 일본에서 교육을 받았고, 선배 교수들처럼 직장동료가 되기 전부터 서로 교류하고 있었다. 김종영과 박갑성은 휘문고보 출신으로 장발의 제자였다. 김종영은 윤승욱의 고보와 대학의 2년 후배였다. 그와 박갑성은 일본에서 다니던 학교는 달랐지만 함께 하숙을 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송병돈은 1934년 김용준, 길진섭, 김환기와 함께 목일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김환기와 유영국은 일본에서 거주하던 시기인 1937년 관학파에 반대하는 미술가들의 단체인 자유미술가협회의 창립전에 함께 참가했었다. 또한 이들은 1947년에는 이규상과 장욱진과 함께 신사실파 그룹을 결성한 후, 그 다음 해 12월에 첫 전시를 열어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기초를 형성했다. 장욱진도,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1953년부터 1961년까지 본교에서 강의를 했다.
1947년과 1948년에 이어 1950년에도 여러 교수가 사임을 하게 되었다. 설립 시기부터 미술부에서 강의한 김환기가 1월 31일에 사직을 했다. 1948년에 임용된 유영국은 1950년 6월 4일자로 총장에게, 1947년에 임용된 신홍휴는 같은 해 6월 6일에 미술부장에게 사직원을 제출했다. 한편 미 술부가 설립될 때 임용된 이순석도 6월 15일자로 미술부장에게 사직원을 제출했다. 이들 셋은 모두 11월 20일에 의원면직되었다. 이들의 사임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거나, 서로 다르다. 1947년 국대안 파동을 통해 드러난 교수들 사이의 성향 및 견해 차이와 그 여파가 1950년에도 여전히 학내 분위기 에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김환기는, 그와 가까웠던 김용준처럼, 특히 장발과 갈등을 겪게 되자 사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자와 가까웠던 유영국은 1950년 자신의 사상을 오해한 장발과의 갈등 때 문에 사직을 했다고 술회했다. 이 시기는 건국 후 반공이념을 통한 사상통제가 이뤄지던 때였다. 길진섭과 같은 날 의원면직된 이병현과 유영국과 같은 날 의원면직된 신홍휴의 사임 이유에 대한 기록 은 거의 전무하다. 1961년에 작고한 그는 6.25전쟁 중에는 당진중학교에서, 1950년대 중반에는 경복 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했다.
한편 이순석의 사임 이유는, 그의 향후 행보를 보면, 장발과의 갈등이나 이념적인 것과는 무관해 보인다. 그는, 뒤에서 서술하겠지만, 6.25전쟁이 발발하자 국방부에 근무했고, 1952년 11월 3 일 미술부에 다시 임용된 후 장발이 주도해 1954년 10월 5일부터 12일 사이에 미도파화랑에서 열린 가톨릭 미술가들의 전시인 《성미술전》에 <십자가와 촛대>로 참가하기도 했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개교 이후 1950년 5월 31일까지 교수가 18명이 임용되었음에도 불구 하고 많은 교수들이 월북·납북·사임 등의 이유로 학교를 떠나게 되면서, 1950년 말에는 이들 중 반 정도만 남게 되었다. 이를 통해서 설립 시기에 본교가 가졌던 교수진의 다양성이 많이 약화되었다. 1951년 11월 문교부에 보고하기 위하여 각 단과대학에서 제출한 「국립서울대학교개요」에 따르면 미 술부 교수로 9명이 기재되어 있다. 그들은 교수: 장발·이순석·박의현·노수현, 부교수: 송병돈, 조교 수: 박갑성·김종영·장우성·이재훈이다. 그러나 대학본부에 있는 손으로 쓴 인사기록 자료에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순석은 1950년 6월 15일 사직서를 낸 후 11월 20일자로 의원면직되었다가 1952년 다시 임용된 것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교수명단에 있고, 박영복은 1952년 11월 20일에, 그리고 공형식은 1953년 4월 1일 의원면직된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교수명단에는 없다. 1953년 3월 10일에는 양승목이 임용되었다가 4월 1일 의대로 전출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에 대한 다른 자료는 없다. 대학본부와 본교에 있는 인사기록 자료에 따르면 1953년 4월 20일 미술부가 미술대학으로 승격할 때 교수는 위의 9명 중 1952년 5월 31일에 퇴직한 이재훈을 제외한 8명이었다. 이 교수진은 미술부 1회 입학생 2명이 교수로 임용된 1954년 4월까지 유지되었다.
3. 6.25전쟁과 미술대학,교수와 학생
교사와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설립된 서울대학교가 교수진을 교체하고, 학생들의 퇴학·정학·복학을 정리한 후 편입생을 모집하면서 국대안파동의 여파를 정리해 가던 중 6.25전쟁이 일어났다. 문리과·공과·법과·상과·의과대학은 1947년 7월 11일 1회 졸업생을 배출했지 만, 4회째인 1950년에서야 첫 졸업생이 나온 본교는 5월 12일 첫 졸업식을 갖자마자 전쟁을 겪게 되 었다. 발발 후 3년 동안 계속된 전쟁을 통해 교육의 질은 나빠졌고, 설비는 파괴되었으며, 앞서 언급 했듯이 여러 교수와 학생이 납북되거나 자의에 의해서 또는 전쟁 중의 활동에 대한 처벌이 두려워서 월북함으로써 대학 전체의 발전이 크게 더뎌졌다.
미술부는 독자적인 교사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단과대학보다 설비 면에서는 피해가 덜했지만 인적인 면에서는 큰 손실을 입었다. 미술부는 장발 부장이 학생들 전체를 파악하고 행동이나 의복 상태를 지적하기도 할 정도로 규모가 작았다. 이에 따라 대학 구성원들도 서로의 성향을 잘 알고 있어서 구성원 사이의 갈등이 쉽게 드러나게 되어, 앞에서 서술했듯이, 학생에게서나 교수에게서 모두 국대안파동의 여파가 컸다. 이 시기에 표면화된 구성원 사이의 이견은 전쟁이 일어나자 이념적인 상호 보복으로 구체화되었다.
국대안을 반대하며 학교를 떠났던 학생들 중 김진항을 포함한 일부 학생들이 전쟁이 일어 나자 대부분의 교수들이 피신해 운영이 마비되어 있던 학교로 돌아 와 9.28 서울수복 전까지 운영 을 주도했다. 1948년 사임했던 김용준은 학교로 돌아왔고, 장발은 피난을 갔다. 국대안파동 시 학생 과장으로 장발 옆에서 국대안을 반대하는 학생들을 설득했던 윤승욱은 피신 중 자택에 잠시 들렸다 가 학생들에게 붙잡혀 간 후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는데, 납북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서울이 수복되고 북한군이 서울을 떠나자 이번에는 반대편이 ‘보복’을 했다. 미술부의 교수 를 포함한 미술인들 사이에서 “도강파”, 즉 피난을 갔던 사람들이 “잔류파”, 즉 피난을 떠나지 못해 서울에 남아 있던 사람들에 대한 “부역자 심사”를 했고, 휴전 후에는 학생들이 서울에 남아있던 학 생들에 대한 “사상 심사”를 하게 되어 학교가 분열되었다.
학생들에 대한 심사가 교수들의 비호를 업은 학생들에 의해 이뤄졌다는 주장은 당시 서울 대학교의 상황과 연결된다. 서울대학교는 1950년 10월 각 단과대학에서 한 명씩 차출해 도강파 교 수를 중심으로 심사위원회를 구성하여 남하하지 못했던 교수들 전원을 자술서, 투서 등을 참고해 심사했다. 위원회는 각 단과대학에서 심사해서 보내온 결과를 재심했다. 대학본부의 전체 위원회는 11월에 단과대학의 심사결과를 거의 재심 없이 문교부에 통고했는데, 그 내용은 파면 114명·권고사 직 15명·정직 34명 등, 총 163명의 교수에 대한 징계였다. 문교부는 이 통고 내용을 재심하여 소수 만 파면, 정직이나 감봉처분을 했는데, 이후 여러 차례 재심을 통해 여러 차례 사면이 이뤄지면서 이 징계조치는 백지화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유영국, 신홍휴와 이순석이 11월 20일에 의원 면직 되었으나, 이들 모두 6.25전쟁 발발 전에 사직서를 제출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위의 징계와는 무관하다. 더구나 이순석은 사직 후 11월에 국방부정훈국 기획 전문위원이, 1952년 2월에는 국방부공군정 훈감 종군화가 단장이 되었다가 같은 해 11월 3일 복직했다. 이들의 사직서의 처리가 4개월이나 걸린 것은 전쟁발발 때문일 것이다.
한편 전쟁 중 미술부의 활동은 두 가지로 나눠 살펴 볼 수 있다. 하나는 학교의 운영이고, 다른 하나는 교수와 학생들의 활동이다. 서울에 있던 대학들은 전쟁으로 개별적인 운영이 불가능해 지자 9월 28일의 서울수복 후에 연합수업을 시작했다. 문교부는 11월 2일 전쟁 전 서울 시내에 있 었던 31개의 공·사립대학을 포함시켜 단일연합대학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렇게 설립되어 운영되던 전시연합대학은 그 다음 해 인민군의 재 남하에 따른 1.4후퇴로 다른 모든 기관과 마찬가 지로 부산으로 내려가 3월 17일부터 재개되었다. 부산의 전시연합대학은 5월 4일 백낙준 문교부장 관이 문교부령 제19호로 공포한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특별조치령”에 따라 문교부장관의 승인을 얻 어 문학부·이학부·의약학부·농수산학부·법정경상학부·수의학부·예술학부와 체육과와 가정과로 편성되었다. 이 대학은 1952년 각 대학교가 독자적인 수업체제를 갖추게 되면서 5월 31일에 해산되 었다. 피난 시 미술부는 처음에는 부산의 일본식 가옥 방 4개를, 나중에는 송도의 해송관이라는 일 본식당 건물을 강의실로 이용했다. 미술부는 1953년 4월 단과대학으로 승격한 후 같은 해 9월 환도 할 때 서울로 돌아왔다.
전쟁 중 서울에 주둔한 북한군은 미술가들에게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을 그리도록 했다. 국군 쪽은 종군화가단을 만들었다. 1950년에 결성된 대한미술협회 부위원장으로서 위원장이던 고희 동과 함께 종군화가단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창단을 서두르던 장발이 공군을 창설한 김정렬장군(전 국방부장관)과 가까운 사이여서 공군종군화가단 창단을 주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그 와 송병돈, 이순석과 장우성이 공군종군화가단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전쟁 발발 전에 학교를 사임 한 이순석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더 일찍부터 국방부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종전 후 1955년에 본교 에 대우조교수로 촉탁된 박득순도 국방부 정훈국선전과미술대의 대원이었다.
한편 부산에서는 교수들과 학생들이 외국에 수출하는 도자기를 생산하던 대한도자기회사 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학생들에게는 작업장 겸 숙소도 제공되어 김세중·서세옥·문학진· 장운상·박세원·권영우·박순일·박노수 등이 회사에서 숙식하며 용돈도 벌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 져 있다. 장우성도 잠시 이 일에 참여했다.
장발이 전쟁 동안 계속 미술부를 지킨 것은 아니다. 그가 서울대학교에 제출한 이력서에 따 르면 그는 1950년 12월 미국무성 초청으로 교환교수 자격으로 미국으로 가 머물면서 피츠버그대학교(University of Pittsburgh)와 미국의 중요 미술기관을 시찰하고 1952년 4월에 귀국했다. 그의 부 재 시에는 철학 교수인 이재훈이 미술부장 서리로 부장 임무를 대신했다.
4. 새로운 시작과 변화를 향한 진통: 1954-1960
1) 새로운 시작: 미술대학으로 승격, 서울로 복귀, 졸업생교수 세대 시작
여전히 피난지에서 수업이 이뤄지던 시기인 1953년 4월 14일 본교의 독립설치안이 각의를 통과해 4월 20일에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장발이 4월 20일에는 초대학장 서리로, 같은 해 10월 16일 에는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이어서 9월 18일 대학본부가 서울로 돌아와 전쟁 중에 건물을 사용하던 미군으로부터 교사를 돌려받았다. 본교도 동숭동으로 돌아와 옛 교사에서 수업을 재개했다.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휴전협정으로 전쟁이 끝난 후 반공이념이 더 강화되었다. 게다 가 교수와 학생 모두 폐허 위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했던 당시 상황은 대학 구성원들 사이의 이념적 인 대립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을 억눌러, 정치적 이슈를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들었다. 본교 로서는 대학으로 승격한 후 구조를 새로 정비하고 확장해 도약을 시도해야 했다. 1954년부터 1960 년 사이에 두 가지 방식으로 젊거나 다양한 교육배경을 가진 교원 일곱 명이 추가되면서 교수진의 성격이 다양해졌다.
교수 임용 상 가장 의미 있는 변화는 본교의 1회 입학생이 본교의 교수가 된 것이다. 1954년 4월 30일자로 조소과에 김세중이, 그리고 회화과에 박세원이 전임강사로 임용되었다. 이들은 26명이 던 1회 졸업생이기도 했다. 이렇게 본교 졸업생이 모교에서 강의를 하게되어 졸업생교수 제 1 세대가 형성되면서 본교의 ‘두 번째’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 시기에는 졸업생 제 1 세대 교수가 ‘탄생’한 것 외에 강의진의 성격에 있어서도 새로운 점이 생겼다. 본부에 있는 자료에 따르면 1955년에는 그 전 해에 전임강사로 임용된 위의 두 졸업생 처럼 1회 입학생인 문학진과 서세옥이 권옥연과 장욱진과 같은 기성 작가와 나란히 시간강사로 회화 실기를 강의했다. 이 두 1회 졸업생은 1961년 같은 날에 전임강사로 임용되었다. 남아있는 기록에 따 르면 이 기간 중에는 학년도에는 꾸준히 외국인 강사가 채용되었다. 1949년부터 1957년까지 강의한 강사명단에는 1952년 1학기에 죤 엘 후랑크는 응용미술실기와 영어를, 그리고 조지프 세켈(Joseph Szekel)은 회화구성을 강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환도한 1953년도의 기록은 없고, 1954년 1학기 에는 맥타 가-드가 미어(美語)를, 1955년 2학기에는 도로티 그난드가 조소실기를, 그리고 윈터 엘딘 트멘이 회화실기를, 1956년에는 1956년 로버-트 엘 클레이가 두 학기에 걸쳐 방직도안 기초구성을, 그리고 가브리엘 빌스마이엘이 장식문자를 강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57년에는 외국인 강사가 없었다.
본부에 남아있는 『교직원이력서철』(1956년 이전)에 따르면 서울대학교에서는 이 시기에 부 족한 교원을 충원하기 위해서 “대우교원에 관한 규정에 따라” 대우조교수나 대우강사 제도를 활용 했다.(<표 1-2>, <표 1-3>) 이것은 교원을 조교수로 “대우”하면서 “촉탁”해 일당으로 급여를 정하고 1 년마다 재임용하는 방식으로 특정 과목을 담당하도록 한, 일종의 강의교수 제도였다.
본교에는 1954년부터 네 명이 대우조교수로 들어왔다. 1954년 같은 날에 김정환은 무대예술 강의를 위해서, 김병기는 회화론, 회화실기 강의를 위해서, 박득순은 1955년에 회화실기 강의를 위해서 임명되었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대우조교수 명단과 그들의 촉탁서류로 남아있다. 반면 장욱진은 대우조교수 명단에는 있지만, 촉탁서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위의 명단에는 그가 1957년 5월 15일에 양화실기 대우조교수로 들어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앞에서 언급한 1949년부터 1957년 사이의 시간강사명단에는 1953년의 기록이 없어 그가 1954년부터 시간강사로 강의를 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1953년 입학생들이 부산에서 그의 수업을 들었다고 회고하는 것을 보면 그는 1953년부터 본교에서 가의를 했다. 한편 당시 학생이었던 졸업생들은 기록과 인터뷰를 통해서 한결같이 그가 4.19 혁명 때 학생들의 퇴진요구대상이 아니었는데도 사직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네 대우조교수의 촉탁·해촉일자가 함께 기재된 본부 자료에는 김장환과 박득순은 1960년 7월 15일에 의원면직인“의원”으로, 그리고 장욱진은 1961년 6월 30일에 “교행”이라는 표현으로 대우조교수 임기가 끝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4.19혁명 후 혼란스러웠던 시기인 1960년 2학기의 강사명단을 본부의 서류철에서 아직 발견하지 못한 상태라 정확한 사실 확인이 어렵다.
이 네 대우조교수들은 모두 일본에서 수학했으나 동경미술학교 졸업생들은 아니었다. 김정환은 일본미술학교 실용미술과를 수료했고, 김병기는 동경미술학원 미술과를, 박득순은 태평양미술학교를, 그리고 장욱진은 동경제국미술학교를 졸업했다. 1959년에는 전임강사가 새로 들어왔다. 김정자가 응용미술과에 임용되었는데, 그는 여자교수로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그의 임용이 본교 역사에서 특별한 이유는 장발에 이어 두 번째로 미국 대학교에서 수학한 교수라는 사실보다 그가 여자교수라는 점이었다. 이에 따라 이 시기 재학생들은 외국인을 포함해 연령대도 다양하고, 교육배경과 작품경향도 다른 교수들과 여교수로부터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김정자에 이어 미국 대학 수학 경험자가 본교 교수가 되는 일은 곧바로 이어졌다. 학위과정은 아니었지만 1961년에 응용미술과(도예전공)에 임용된 권순형은 1959년부터 1960년 사이에, 그리고 1963년에 역시 응용미술과(산업디자인)에 임용된 민철홍은 1958년부터 1959년 사이에 미국 대학교에서 1년간 연수를 받았다. 이들은 본교 졸업생의 첫 외국 수학 세대에 속한다. 본교를 중퇴한 후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전성우는 1967년에 임용되었다. 그 후 1981년 본교 출신의 미국 유학생이 교수로 임용되기 시작하기 전에도 미국이나 영국의 대학에 연수를 다녀온 교수들이 여럿 있었다. 그러나 본교에 두 번째 여자교수가 들어온 것은 김정자 임용 후 22년 반이 지난 1981년 12월로, 이 때 응용미술과에 유리지가 들어왔다.
한편 대학본부의 인사기록에서는 미술부가 미술대학으로 승격되기 직전인 1953년 4월 1일부터 그 해 말까지 본교의 교직원 신분에 있어서 특이한 사항이 발견된다. 찾아볼 수 있던 본부 자료에 따르면 교수 2명과 전직 조교 1명과 현직 조교 1명의 신분이 “의과대학 겸 미술대학에 겸직”으로 나와 있다. 교수로는 김종영과 송병돈이 1953년 4월 1일부터 그해 10월 15일까지 “의과대학 겸 미술대학 근무를 명함”을 받았다가 12월 28일에 미술대학 교수로 임명을 받았다. 1953년 3월 28일에 본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1954년 4월 30일에 본교 전임강사로 임용된 김세중과 박세원도 1953년 “의과대학 겸 미술대학 근무를 명함”이라는 임무를 받았다. 전자는 1953년 4월 1일부터 직위는 명시되지 않은 채 “명함”을 받았고, 후자는 5월 15일 조교 임명을 받은 상태에서, 역시 직위는 명시되지 않은 채 “임함”을 받았다가 위의 두 교수들과 마찬가지로 10월 15일 총장 명의로 “의과대학 본무를 면함”을 받았다. 더 특이한 것은 양승목이 1953년 3월 10일 본교에 임명되었다가 위의 네 명이 겸무를 시작한 날과 같은 날에 의대로 전출된 것이다.
2) 4.19혁명과 학내 진통
1960년 4.19혁명 시 본교가 있던 동숭동은 혁명의 주요 무대들 가운데 하나였다. 본교 학생들도 동숭동이나 그 주변에 있던 문리과대학·법과대학·의과대학·동성고등학교 등의 학생들과 함께 시위대 속에 있었다. 당시 시위 중에 사망한 서울대학교의 “4.19 열사” 7명 중에는 본교 3학년 학생이던 고순자도 있다. 한편 교수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선거 재실시 등의 요구사항을 담은 교수선언을 발표했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기 전날 발표된 “4.25 교수시국선언”에 교수 258명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 41명의 명단이 2010년 4월에 발표되었다. 그들 가운데 서울대학교 교수는 21명이었는데, 이들 중 네 명(김종영·송병돈·박갑성·박의현)이 본교 교수였다. 이들은 모두 장발과가까운 사이였다. 김종영과 박갑성은 장발의 고보 제자였고, 김종영과 송병돈은 장발이 심사부위원장이던 그해 국전의 심사위원이었다.
자유당 정권의 3.15부정선거에 대한 항의로 시작된 4.19혁명이 지닌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과 항의는 본교에서는 학장 장발과 그의 학사 운영에 대한 반대로 표출되었다. 당시 본교의 교수진에는 장발·이순석·김종영·박의현·노수현·송병돈·박갑성·김세중·박세원·김정자 교수와 김정환·박득순·장욱진 대우조교수가 있었다.
1960년 5월 학생들은 결의문을 통해서 학장과 교수 박갑성과 박득순의 사임과 함께 학사운영과 공간문제의 개선도 요구했다. 학생들은 미학교수인 박갑성이 퇴진해야하는 이유를 미학과가 문리과대학에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들면서, 미학과를 문리과대학으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박득순에 대한 불만은 그의 관학파적 화풍에 대한 것이었다. 특정 화풍에 대한 비판은 다수 등장한 미술선언들과 1958년부터 한국 화단에 주류 형식으로 유행한 추상미술을 전위적인 미술로 보던 당시의 분위기가 본교 재학생들과 본교를 갓 졸업한 미술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960년 10월 회화과와 조소과 학생, 각각 7명과 10명은 벽동인회를 결성해 덕수궁 담 벽에 작품을 걸거나 세워 놓고 ≪벽전≫을 열었다. 그들은 지도교수였던 송병돈이 ‘재학생 교외 전 금지’라는 학칙을 근거로 강경하게 반대했으나, 본교 교수들이 심사위원으로 있던 국전 개최일인 10월 1일에 맞춰 당시 국전에서는 수상이 불가능하던, 석탄재·철사·마대 등의 재료와 구멍 뚫린 판자나 천 등으로 제작된 작품으로 거리전시를 열었다. 당시 3학년이던 이 학생들의 전시가 외관상으로는 국전에 4학년부터 참가할 수 있던 당시 본교 학칙을 비판하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들보다 1, 2년 선배인 졸업생과 재학생 6명은 그해 7월 화단의 동년배들과 함께 60년미술협회를 결성해 ≪벽전≫ 개막일 나흘 후 역시 덕수궁 담 벽에 추상회화 작품들을 걸고 ≪60년미협전≫을 열었다. 4.19혁명을 통해 분출된 당시 젊은이들의 개혁 의지는 본교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에게 기성세대와 구상적인 미술에 대한 반발로 표출되었다. 본교 동양화과 졸업생들이 전통적인 동양화 기법과 교육방법에 반대하면서 묵림회를 결성해 3월에 창립전을 연 것도 이 해이다.
1960년 당시 학생들의 요구는 부분적으로 관철되었으나 일부는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실행되었다. 1960년 10월 10일 미학과가 문리과대학으로 옮겨갔다. 같은 해 박의현과 박갑성이 미학과와 함께 이관되었는데, 후자는 1961년 본교로 돌아와 장발 후임으로 본교의 2대 학장이 되었다. 박득순은 1960년 7월 15일을 끝으로 재임용되지 않았다. 장발은 미학과가 이관되자 1961년 예술학과를 설치했다. 그러나 이 학과는 1년 동안만 유지됐다.
5. 장발 이후
4.19혁명이 일어나고 나서 정확히 13개월 후 민주당정권을 전복시킨 5.16쿠데타가 일어났다. 장발은 6.25전쟁이 끝난 후 한 차례, 그 다음에는 4.19혁명 시 학생들에 의해 다시 퇴진요구를 받았지만 사직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태리대사로 가기 위해 1961년 5월 9일 사직한 후, 5월 15일 서울대학교 총장의 “주 이태리대사로 전출” 인준을 받았다. 그러나 그 다음날에 일어난 쿠데타로 당시 국무총리였던 장면을 형으로 두었던 그는 대사가 되지 못했다.
장발이 떠난 후 교수진에 있어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장우성은 새로 들어선 군사정부의 가이드라인에 의해서 7월에 사임했다. 열흘 후에는 장욱진이 대우조교수 중 마지막으로 학교를 떠났다. 이어서 8월 31일에는 새로운 교수가 6명 임용되었다. 1961년 8월 31일 김정록이 1년 동안 존재했던 예술학과에 들어왔지만 이 학과가 1년 만에 폐지되면서 그는 그 다음 해 4월 25일에 미학과로 전보되어 갔다. 회화과에는 류경채·서세옥·문학진·정창섭이, 그리고 응용미술과에는 권순형이 들어왔다. 류경채만 동경 녹음사화학교 출신이고, 나머지 네 명은 본교 졸업생이었다. 회화과 교수 세 명은 편입생을 포함해 1회 입학생이었고, 권순형은 4회 입학생이었다. 이에 따라 본교 1회 입학생 중 9명이 대학교수가 되었는데, 그들 중 5명이 모교로 왔다.
한편 노수현과 송병돈이 각각 1961년과 1962년에 정년으로 퇴임하면서, 1962년 2학기에는 1940년대 후반에 임용된 14명의 교수들 중 세 명(이순석·김종영·박갑성)만 남게 되었다. 이 해 5월에는 조소과 6회 입학생인 송영수가, 11월에는 본부 교무과의 졸업생 자료에 따르면 회화과 4회 입학생인 박노수가 새로 들어와, 교수가 13명이 되었다.
이렇게 교수진에 큰 변화가 있었고, 장발은 본교를 떠났지만 본교의 설립을 주도한 후 15년 동안 미술부장과 학장으로 있었던 그의 존재감이 곧바로 사라지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그가 떠나고 나서 20년이 되는 1981년을 기해 교직원 구성 성격에서 그의 영향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게 되는 여러 상황이 발생했다. 즉 1980년에는 장발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던 김종영이 1세대 교수 중 마지막으로 퇴임하고, 1981년에는 외국유학 경험자들이 임용되기 시작해 그 후에는 그 수가 증가했다. 그 외에도 이 해에는 졸업정원제라는 새로운 입시방식이 도입되는 등, 본교는 안팎으로 기존의 학교분위기나 교육방식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을 접하게 되었다. 1981년에 시작된 졸업정원제를 통해서는 본교만이 아니라 모든 대학이 변화를 해야 했다.
우선 장발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던 교수들 네 명이 그에 이어서 차례로 학장이 되었는데, 그들 중 마지막 학장인 박세원의 임기가 1981년에 끝났다.(<표 2>) 장발이 전출된 5월 15일 그의 후임학장으로 임명된 박갑성은 휘문고보에서는 전자의 제자였고, 본교에서는 12년 동안 직장동료였다. 1968년까지 7년간 학장을 역임한 그의 후임으로 김종영이 학장이 되었다. 그 역시 장발의 제자였고, 13년 동안은 직장동료였다. 1968년부터 1972년까지 학장을 역임한 김종영의 후임으로 1972년에 학장이 된 김세중은 전임자의 조소과 제자로 장발이 학장이던 시기에 교수로 임용되었고, 후자가 주도하여 설립한 교육제도 하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7년간은 직장동료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장발을 건축 총감독으로 1959년에 완성된 혜화동성당을 위해 건축 외벽 조각 <십자고상>과 <최후의 심판도>, 제대 등을 제작했다. 성당에 김종영, 이순석과 미국대사관 문정관의 부인으로 1962년 9월 1일부터 1963년 2월 28일까지 조소과 강사를 역임한 핸더슨(Maria C. Henderson)의 작품도 있었지만, 김세중의 작품이 가장 많았다. 1977년까지 학장을 역임한 그의 후임으로 그와 입학 및 졸업 동기이자 ‘입사’ 동기인 박세원이 학장이 되어 1981년까지 역임했다. 그도 앞에서 언급한 교수들과 작고 직전에 영세를 받은 김종영처럼 가톨릭 신자였을 뿐만 아니라 장발의 대자였다. 1980년 8월 31일 네 학장들 중의 한 명이자, 장발의 고보 제자였던 김종영이 정년을 맞아 퇴직했다. 그는 본교 졸업생교수가 임용된 1954년 전에 본교에 임용된 교수들 중 가장 마지막으로 퇴임했다. 1960년대에 임용된 교수들도 대부분이 장발이 학장이던 시기에 본교에서 수학했으나 그와의 관계는 이전에 임용된 교수들과는 달랐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1981년은 본교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나서 구미 국가에서 유학한 후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졸업생이 교수로 들어온 해이기도 하다. 전준(조소과)과 유리지(응용미술과)가 약 한 달 간격을 두고 임용되었다. 이후 구미 국가에서 유학한 본교 졸업생교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이전에도 구미 국가의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임용된 교수가 세 명이 있었지만, 그들은 본교 졸업생이 아니었다. 김정자는, 프랑스에서 유학한 후 1965년에 임용된 임영방과 마찬가지로, 본교 출신이 아니었고, 전성우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미국에서 대학을 다녔다. 1981년부터 1988년 사이 동양화과 2명, 서양화과 3명, 조소과 3명, 금속공예전공 1명, 공업디자인 1명 그리고 도자공예전공 1명이 새로 임용되었는데, 이들 11명 가운데 5명이 외국학위 소유자였다.
외국학위를 가진 신임교수가 늘어나는 경향은 1990년대 들어 더 현저해졌다. 1994년부터는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본교의 학부졸업생이 교수로 임용되기 시작했는데, 그 수도 증가했다. 여전히 미국에서 공부한 교수가 많지만 유학 국가도 다양해졌다. 1993년 이후 2016년 8월 현재까지 37명이 새로 들어왔는데, 이들 가운데 7명인 19%만 최종학교가 국내대학이다. 37명 중 외국인인(독일인, 미국인) 2명을 빼면, 그 비율은 20%다. 유학한 나라별로 보면 30명 중 약 57%인 17명이 미국, 7명이 독일, 5명이 영국이고 1명이 일본이다.
6. 연건동 교사(1963. 4-1972. 8): 학생운동의 중심 무대 옆의 미술대학
1963년 2월 20일 본교의 교사 이전이 결정되어 4월에 우선 회화과·도안과·부속실·학장실 등이 일제 강점기에 경성의학전문학교의 교사였던 연건동의 수의과대학 건물로 이전했다. 조소과는 나중에 합류했다.
1960년대는 8개월 동안 머문 김정록을 포함해 19명이 새로 임용되어 신임교수가 가장 많이 들어 온 10년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1961년 장발이 의원면직된 후 8월 31일에 6명의 교수가 새로 들어왔다. 그 후 1969년까지 13명이 더 들어왔다. 1970년대에는 5명, 1980년대에는 12명, 1990년대에는 12명, 2000년대에는 15명, 그리고 2010년대에는 10명이 새로 임용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들어온 교수들 중 대다수가 본교 출신 교수들의 수업을 들었다. 이에 따라 졸업생교수 ‘제 2 세대’가 탄생하게 되었다.
본교가 연건동 교사를 사용하던 시기는 여러 면에서 다른 시기와 구별된다. 이 시기에는 교수 14명이 새로 임용됐다. 이들 가운데 전성우가 4년 만에 사임하게 되어 비게 된 자리에 윤명로가 들어왔다. 김교만(1928생)과 임영방(1929생)을 제외한 신임교수들 중 대부분이 1930년대 중반 출생이고, 양승춘의 경우는 1940년생이어서, 젊은 교수 수가 크게 증가했다. 이들 중 적어도 세 명은 정년퇴임한 교수를 대체했기 때문에 교수진의 평균연령도 낮아졌다. 1962년 4월 25일 미학교수 두 명(1948년부터 본교에 재직한 박갑성과 1961년 8월에 임용된 김정록)이 문리과대학으로 전보된 후 이론교수로 유근준(1963)과 임영방(1965?)이 들어왔다. 전자는 본교 미학과 졸업생이다. 이 둘은 임용 전부터 본교에서 강의를 했다. 한편 학생들은 학생운동의 중심 무대 옆에서 그 운동을 주도하던 다른 단과대학 학생들과 사회비판의식의 공감대를 키워가고 있었다.
4.19혁명으로 시작된 1960년대에는 국대안반대 데모가 있었던 40년대 후반처럼, 그리고 위수령 제정(1970년 4월), 위수령 발동(1971년 10월 15일)과 그에 따른 대학 내의 군부대 주둔, 10월 유신 발표(1972년 10월 17일) 등으로 이어진 70년대와 “서울의 봄”과 광주민주항쟁으로 시작된 80년대처럼 학생들의 데모, 임시휴교령이나 전면휴교령이 반복되었다. 학생운동의 중심지에 교사가 있던 이 시기의 본교 학생들은 4.19혁명이 일어났을 때처럼 다른 대학의 학생들과 함께 데모에 참여했다. 이러한 점은 본교가 1972년 9월부터 1975년 사이 외진 곳인 하계동에 있을 때나 익명적으로 지낼 수 있는 넓은 관악캠퍼스에 있던 시기에 본교 학생들이 학생운동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었던 것과 대조된다.
1964년 3월부터 한·일 굴욕회담반대 데모가 시작되어 문리과대학에 수 천 명의 학생들이 모이면서 본교 건물에 경찰이 난입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본교 학생들도 문리과대학생들과 함께 데모를 했다.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이 선포한 삼선개헌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데모로 학교가 임시휴교에 들어가고 대학 전체가 휴강을 하게 되자, 본교 학생회는 10월 4일 휴강해제를 요구했다. 그해 10월 25일경에는 조소과 학생(오윤), 회화과 학생(오경환)과 응용미술과 학생(임세택)이 미학과 학생(김지하)과 함께 그룹 현실동인을 결성하고 선언서를 발표하면서 정치적·사회적 현실을 반영한 작품을 전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본교 교수들과 중앙정보부의 저지로 전시가 열리지는 않았다. 4.19혁명이 일어난 1960년과 5.16쿠데타가 일어난 그 다음 해에 본교의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이 추상미술로 기성세대에 저항하려 했었다면, 이 네 명의 학생들은 “4.19 정신”을 현실을 비판하는 리얼리즘 미술로 이어가고자 했다. 위와 같은 학생데모와 미술 활동들은 동숭동과 연건동 교사의 일상에서 경험하고 실천할 수 있었던 학생들의 사회참여와 맥을 같이 하는 동시대적 발언이었다.
7. 하계동 교사(1972. 9-1976. 2): 유보적 상태의 미술대학
본교는 1972년 9월, 정부의 “서울대학교 종합화 계획”에 따라 하계동에 있던 교양과정부 교사에 마련된 임시교사로 이전했다. 이것은 1971년 4월 관악산에서 기공식을 가진 서울대학교 종합캠퍼스 시대를 대비하기 위한 임시적 조치였다. 본교 학생들은 교사를 이전하자마자인 10월 17일, 10월 유신 발표에 따라 서울대학교에 내려진 전면휴교령에 따라 교사 출입을 금지당했다.
하계동 교사 시기에는 교수 변동이 없었다. 연건동 교사 시기인 1972년 5월에 윤명로가 임용된 후 관악캠퍼스 시기인 1977년 10월에 부수언이 들어올 때까지 퇴임한 교수도 새로 임용된 교수도 없었다. 이 시기에는 교과과정 상에도 변화가 없었다. 다만 입학시험 방식에는 변화가 생겨, 특히 회화과의 실기고사 과목이 복잡해졌고, 1976년에는 시험과목도 늘어 실기 I과 II로 나뉘면서 회화과 지원자가 응용미술과 지원자의 시험과목이었던 구성도 보게 되었다.(II장 <표 4> 참조)
한편 이 시기에는 본교 회화과 교수 중 정창섭·김태·문학진·신영상과 1979년에 임용된 이종상은 정부의 민족기록화 사업 중 전승편·구국위업편·경제편에 참여했고, 1977년에는 문화편에도 참여했다. 이 시기 학장은 김세중이었다.(<표 2>)
8. 종합캠퍼스(1976. 3-): 학생·교사·운영의 분산
1975년부터 서울대학교가 교사를 단과대학별로 관악종합캠퍼스로 이전하기 시작하면서 본교도 하계동에서 1976학년도 신입생들의 입학시험 행사를 마친 후 “2차 이전 팀”에 속해 1976년 2월 50동·51동·52동으로 이뤄진 현재 교사로 옮겨왔다. 종합캠퍼스로 이사 온 후 본교에 일어난 가 장 큰 변화는 구성원 사이의 연대감과 결속력이 줄어든 것이다. 종합캠퍼스로 이전하기 전에는 본교 는 대학교(university)에 속했어도 독자적으로 운영해 대학(college) 같은 형식이었고 교사도 작아, 학생들이 소속 학과나 전공의 경계를 넘어 ‘미대인’으로서의 결속력을 키우기가 용이했다. 그러나 종 합캠퍼스에서는 학생들이 교양과목을 본교 교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대학 건물로 가서 타 대학 학생들과 함께 듣고, 교과 외 활동도 전교 학생이 속한 동아리를 통해서 하는 것이 늘어나게 되면서 점점 더 본교 학생들 사이의 결속력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경향을 가속화한 것은 1981년부터 1987년 사이에 실행된 졸업정원제에 따라 학생 수가 급증한 것과 2008년 도입되어 학생이 전공과정을 스스로 설계하고 운영하게 만든 학부 전공방 식의 다양화다. 1983년 3개 학과가 5개학과구조로 바뀐 것과 1998년에 시작된 3개 학과와 1개 학부 제도도 본교 구성원의 분산을 촉진했다. 3학년 때 전공을 선택하던 3개학과구조와 달리 이미 1학년 때 전공이 결정되어 학생들은 다른 학과 학생들과 만날 기회가 적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3개 학과 와 1개 학부제 시기에는 더 심해졌다. 더욱이 1976년 관악캠퍼스로 이전해 개교 후 처음으로 독립적 인 교사를 가지게 되고 나서 23년 후인 1999년 공간을 확장해 디자인학부의 디자인전공이 기존의 건물들과 분리된 새로 지은 건물(49동)로 이전한 후 디자인전공과 다른 전공 및 학과와의 연대감이 더 약화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각 학과가 입시방법이나 학과목 개설 등에서 운영의 자율성과 차별성을 점 점 더 강조하게 되면서 더 강해졌다. 2015년에는 본교가 주도해 예산을 마련해 음·미대 식당을 헐고 새로 지은 건물인 74동 예술복합연구동에 동양화과와 서양화과의 석사와 박사과정 학생과 조소과 박사과정 학생, 그리고 동양화과와 서양화과의 교수가 이사해 들어갔다. 본교가 더 많은 공간을 교 사로 확보한 것은 긍정적이지만, 이를 통해서 교사가 세 군데로 나눠지게 되어 본교의 구성원들끼리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더 적어지게 되었다.
종합캠퍼스 시대에는 본부가 대학 전체의 학사운영·교과목 개설·학과구조·입시 등을 통일 시켜 운영해 왔기 때문에 본교의 이 사안들도 종합캠퍼스 시기 이전에 비해 크게, 그리고 자주 바뀌 었다. 남녀분할모집·졸업정원제·입학시험 방식의 다양화·대학원중심대학으로 운영하려는 본부 방 침에 따른 큰 폭의 학부정원 축소·학부 전공방식의 다양화 등은 1976년 이후 본교가 겪은 큰 변화 들 중의 중요한 사안들이다.
관악캠퍼스 시기에는 본교 학위과정이 확대되었다. 1986년에는 기존의 실기 석사과정에 미 술이론전공 석사과정이 추가되었고, 2000년대에는 실기 박사과정이 설치되었다. 미술이론전공 석사과정은 2009년에 미술경영 석·박사협동과정으로 “변경 설치”되었다. 2013년에는 디자인학부에 디자인역사문화전공 석·박사과정이 신설되었다. 이와 더불어 교수의 전공분야도 다양해져, 1993년 이후 미술사 교수와 미술교육 교수가 외국인 교수 1명을 포함해 7명이 임용되었다. 한편 1990년대 들어 본교 교수 중 외국 유학 경험자 교수비율이 크게 증가한 것이 시사하듯이 본교 졸업생의 외국 유학이 계속 증가했다. 외국으로 유학을 가는 졸업생 수의 증가는 1987년에 시행된 해외여행자율화 조치 이후에 나타난 전국적인 현상이다.
1990년대 이후 정부는 대학에 학생선발 방식에서만이 아니라 교수선발방식에서도 다양화를 요구했다. 2000년대에 들어 본교에 외국인 교수가 2명 임용되었는데, 현재는 1명만 남아있다. 한편 서울대학교는 1999년 말부터 신규교수의 1/3 이상을 타교(본교 타 학과 포함) 출신으로 선발토록 한 교육공무원 임용령(1999년 9월 발효)을 적용해왔다. 본교에도 1999년 말 이후 임용된 교수 25명 중 타교 출신은 외국인 2명을 포함해서 5명이고, 타과 출신은 2명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현재 전체 교수 36명 중 외국 유학을 하지 않은 교수는 7명인 19%다. 이들 7명 중 3명이 동양화과 실기교수이다. 여자교수는 외국인 교수 1명을 포함해서 9명이다. 9명 중 5명은 이론교수이다. 본교에 개교 시부터 2016년 3월 1일까지 – 천문학을 강의한 공형식은 포함하고, 본부에 있는 『교직원대장』에 약 20일간 재직하면서 체조훈련을 강의한 것으로 기록된 양승목은 제외하면(<표 1-1>) – 총 94명의 교수가 임용되었다. 이 가운데 외국인 교수 1명을 포함한 11명이 여교수이고, 그 비율은 전체 임용자들 중 11.7%이다. 11명 중 9명은 1994년 이후에 들어왔다.